도심 속 어디에서든 보이는 바위산 하나.
그날 우리는 그 정상, 인왕산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수성동계곡에서 출발한 발걸음은 이른 봄의 초록에 젖은 나무들 사이를 조심스레 헤집고 올랐다.
안내도 앞에 잠시 멈춰 오늘의 길을 그려본다.
높이 338m. 결코 높지 않지만, 그 안에 담긴 풍경은 산 하나를 넘는 깊이를 품고 있었다.
인왕산, 그 이름 아래 펼쳐지는 길
함께한 일행은 셋.
길을 안내해준 친구는 인왕산을 여러 번 올랐던 이로, 오늘은 산 중턱을 가로지르는 비교적 가파른 ‘지름길 코스’를 택했다.
산을 자주 찾지 않는 선배도 함께였기에, 조금은 걱정도 됐지만 “도심 속 산이니 괜찮겠지”란 가벼운 마음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계단은 나무로 잘 놓여 있었고, 숲의 그림자와 햇살이 교차하는 길 위로 바람이 낮게 흘렀다.
길 중간중간, 수북한 돌무더기 위에 얹힌 소망의 돌들이 눈에 띈다. 나도 그 위에 조심스레 마음 하나 얹는다.
인왕산 주요 등산 코스 안내
① 수성동계곡 코스 | 수성동계곡 → 인왕산 정상 | ★★☆☆☆ (초보 추천) | 약 1시간 |
② 자하문 코스 | 자하문고개 → 정상 → 한양도성길 | ★★★☆☆ (전망 좋음) | 1.5~2시간 |
③ 홍제천 코스 | 홍제천 → 윤동주문학관 → 정상 | ★★★☆☆ | 약 2시간 |
④ 무악재 코스 | 무악재역 → 능선 따라 정상 | ★★★★☆ (바위길 많음) | 2시간 이상 |
Tip:
- 수성동계곡 코스는 계단 정비가 잘 되어 있어 초보자에게 적합합니다.
- 무악재 코스는 암릉 구간이 있어 등산화를 권장하며, 바위 타기를 즐기는 분들에게 인기 있습니다.
기억 저편의 바위 하나, 그리고 성곽의 흔적
올라가다 마주한 거대한 바위 하나.
언뜻 보면 평범하지만, 역사 공부 중인 친구가 알려준 그 정체는 '옥개석(屋蓋石)'이었다.
한양도성의 여장(女墻) 위를 덮던 지붕돌.
시간 속에 파묻혀도 묵묵히 제 역할을 하던 돌이, 오늘 우리의 발걸음 앞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성곽의 흔적을 따라 걷다 보면, 이 도시의 오래된 결이 살짝살짝 모습을 보인다.
높은 빌딩들 뒤로 성곽이 이어지고, 멀리 경복궁의 기와지붕이 가늘게 빛난다.
서울을 품은 바위, 정상에서의 풍경
정상에 오르면 말이 필요 없다.
북악산 너머로 청와대가, 남쪽으로는 남산타워와 한강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 도시가 얼마나 다층적인지, 얼마나 많은 결을 품고 있는지 새삼 깨닫게 된다.
정상은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어 꽤 단단하고 바람이 시원하게 지난다.
주말이면 많은 이들이 줄을 서서 정상의 바위길을 오르는데, 그날은 평일 오후라 잠시 조용한 정적이 내려앉아 있었다.
숲속 쉼표, 인왕산 숲속쉼터
하산 길에 들른 ‘인왕산 숲속쉼터’는 예전 군사 초소였던 곳을 개조해 시민을 위한 공간으로 다시 태어난 장소다.
목재로 지어진 공간은 자연과 잘 어울리며, 통유리를 통해 인왕산 숲의 풍경이 그대로 들어온다.
창 너머로 흐드러진 초록을 바라보며 조용히 앉아 책을 읽는 사람들.
그 풍경은 분명 아름다웠지만, 환기가 되지 않아 유리 너머의 바람이 실내에 스며들지 않는 건 조금 아쉬웠다.
숲의 쉼터라면 바람이 들고 나야 하지 않을까. 눈이 아니라, 몸이 먼저 느낄 수 있어야 하는 공간이어야 하지 않을까.
마무리하며
도심 한가운데서 만난 고요한 산.
인왕산은 그리 높지 않지만, 그 안엔 우리가 잊고 지낸 여백과 숨결이 숨어 있었다.
하루쯤, 스마트폰은 주머니에 넣고, 천천히 걷는 발걸음으로 이 산을 느껴보기를.
봄바람 따라 길 위에서 나를 만나는 일. 그 시작점에 인왕산이 있기를 바란다.